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문단 편집) == 생애 == 1846년 [[아이즈 번]] 8대 당주인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B%8B%A4%EC%9D%B4%EB%9D%BC_%EA%B0%80%ED%83%80%ED%83%80%EC%B9%B4|마츠다이라 가타타카]]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어, 1852년 번주를 승계하였다. 1860년 [[에도 막부]]의 [[오대로|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막부는 나오스케의 살해범들이 주로 [[미토 번]] 출신[* [[존황양이]]의 선두격 존재로, 존황사상에 기울어진 번사들이 많았다.]의 무사들이라는 이유로 미토 번을 토벌하려 하였고, 카타모리는 이에 반대했다.[* 사실 카타모리의 조부인 9대 다카스 번주 [[https://ja.wikipedia.org/wiki/%E6%9D%BE%E5%B9%B3%E7%BE%A9%E5%92%8C|마츠다이라 요시나리]]는 원래 6대 미토 번주 [[https://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6%B2%BB%E4%BF%9D|도쿠가와 하루모리]]의 차남으로 다카스 번에 말기양자로 들어가 가독을 승계했기 때문에 혈통상으로 보면 카타모리도 미토 도쿠가와의 후손인 셈이다.] 1862년 가타모리는 [[쇼군]]의 후견인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C%BF%A0%EC%9D%B4_%EB%B2%88|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추천으로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다. 본래 병약했던 카타모리는 가신들의 반대를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요시나가의 강권에 결국 교토수호직을 받아들였다. 가타모리가 처음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을 때 [[존황양이]]파와의 대화로 조정을 시도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목상을 훼손하고 목을 강에 버린 아시카가 목상효수 사건이 일어나자 공무합체파와 존황양이파를 적대했다. 이후 [[신센구미]]의 전신인 미부로시와 쿄토 [[미마와리구미]]를 조직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와 [[교토]]의 치안유지를 맡겼다. [[금문의 변]] 사건이 일어나자 [[조슈 번]]과 [[아이즈 번]]은 각각 도막(倒幕)과 좌막(佐幕)의 선봉에 서고, [[신센구미]]와 [[사쓰마]]군[* 원래 [[사쓰마 번]]은 조슈와 적대하는 입장이었다. 두 번을 극적으로 동맹시킨 사람이 [[사카모토 료마]].]은 병사 인원도 부족하고 훈련과 장비도 부실했던 조슈 군을 격퇴하나, [[교토]]는 불바다가 되었다. 1866년 카타모리를 믿고 신뢰했던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자 교토수호직을 몇번이나 그만두고자 했지만, 막부와 조정의 반대로 계속 교토에 남았다. 이후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자 교토수호직도 폐지되었다. 약 5년간의 교토수호직을 맡아서 막대한 돈을 쓰게 되어 아이즈 번은 재정이 흔들린 상태였다. [[무진전쟁|도바 후시미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조정의 신정부군에 패하고, [[아이즈 번]]으로 퇴각했다. 신정부군은 아이즈 번의 토벌을 계획했고,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오우([[도호쿠]])의 번주들[* [[https://ko.wikipedia.org/wiki/%EC%84%BC%EB%8B%A4%EC%9D%B4_%EB%B2%88|센다이 번]]주 [[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D%85%8C_%EC%9A%94%EC%8B%9C%EC%BF%A0%EB%8B%88|다테 요시쿠니]]와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B%84%A4%EC%9E%90%EC%99%80_%EB%B2%88|요네자와 번]]주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7%90%EC%8A%A4%EA%B8%B0_%EB%82%98%EB%A6%AC%EB%85%B8%EB%A6%AC|우에스기 나리노리]] 등]은 아이즈 번의 구명을 탄원했으나, 오우진무총독부 부참모였던 조슈 번의 [[https://ja.wikipedia.org/wiki/%E4%B8%96%E8%89%AF%E4%BF%AE%E8%94%B5|세라 슈조]]에 의해 기각당했다. 이후 세라 슈조는 센다이 및 후쿠시마 번사들에게 살해당하며, 아이즈와 센다이 등은 오우에츠 열번동맹을 결성하고 오슈, 우슈, 에치고의 대다수 번들을 끌여들여 신정부군을 상대로 무력으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시라카와구치 전투를 시작으로 니혼마츠 전투,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아이즈 와카마츠 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1868년 11월 6일 백기를 걸고 항복했다.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성이 함락됐다고 착각한 16세~ 17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백호대 2번대 50명 중 20명이 이이모리산에서 집단 자살하였는데, 이를 [[가미카제]]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안타깝고 어리석은 이야기이지만, [[후쿠시마현]]에서는 '''미담'''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족으로, 자결을 시도한 20명 중 1명인 [[https://ja.wikipedia.org/wiki/%E9%A3%AF%E6%B2%BC%E8%B2%9E%E5%90%89|이이누마 사다키치]]는 숨이 붙은 채로 발견되어 구출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도 공무원이 되어 일하다가 훗날 [[청일전쟁]]에 참전한다. 호는 고호(孤虎), "[[백호]] 20마리 중에 살아남은 1마리의 외로운 [[호랑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대위로 전역했으며 이후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까지 지켜보다가 1931년 향년 77세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집단자결 당시가 17세였다. 항복 이후 가타모리는 [[https://ko.wikipedia.org/wiki/%EB%8F%97%ED%86%A0%EB%A6%AC_%EB%B2%88|돗토리 번]]의 감시 아래 [[도쿄]]에서 칩거하지만, 장남 가타하루의 가독 승계를 인정받아 [[화족]]이 되었다. 이후에는 구 막부 측에 선 죄로 탄압받는 [[아이즈 번]]을 쓸쓸히 바라보며, 힘든 처지에 빠진 옛 가신들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냈다. 1880년 [[닛코 동조궁]]의 궁사[* [[신사(신토)]]의 [[신관]]]가 되었으며 1893년 12월 5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향년 57세. 가타모리는 가신들을 잊지 않았고, [[신센구미]]와 [[곤도 이사미]] 같은 인물들을 안쓰럽게 추억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훗날 가타모리의 손녀 [[마츠다이라 세츠코]]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결혼했다. 또한 현 도쿠가와 종가의 당주인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는 혈통상으로는 카타모리의 증손자로 어린 시절 종가에 양자입적하여 당주가 되었다. [[메이지 덴노]]는 가타모리가 죽기 전에 [[우유]]를 하사했다.[* 당시의 우유는 대단히 비싼 식품이라 [[황족]]이나 [[고관대작]], [[부자]]가 아닌 이상 먹기 어려웠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군이 특별히 하사하는 상으로도 많이 쓰였다.][* 야사에 의하면, [[메이지 덴노]]는 그가 살아있었다면 [[다이쇼 덴노]]의 [[섭정]]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 가타모리의 사망 이후인 몇년 뒤에 황실에서 정삼위 추증과 더불어 "忠誠霊神(충성영신)"이라는 [[신호]](神号)가 결정되었다. 막부 최후의 충신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주군 요시노부가 항복한 후에도 무리하게 전쟁을 이어가면서 아이즈를 파멸로 이끌고 백성들을 굶주림과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하다. 애초에 교토 수호직을 맡으면서 아이즈의 재정은 파탄 직전까지 몰려 아이즈 주민들은 과도한 세금에 시달렸으며 군의 근대화도 제때 이루어지지 못해 신정부군에 연전연패하는 큰 이유가 되었다. 당시 아이즈 번의 서민들에게 가타모리의 평판은 꽤 나빴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쟁에서 아이즈 무사들과 징집병들이 입은 괴멸적인 피해, 전쟁 패배 이후 신정부로부터 받은 각종 차별대우로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현대 도호쿠인들의 정치적 사정과 피해의식, 각종 문화, 관광산업이 가져다주는 수익 때문에 소위 '관광사학'이라고 불리는 왜곡된 사관으로 변질되어 당대 도호쿠 민중에 대한 수탈이나 정치, 군사 분야의 실정은 없던 것으로 치부되다시피 하고 있고, 각종 미디어에서 가타모리는 성군으로 묘사되며 아이즈의 보신전쟁 관련 묘사는 가타모리에게 충성한 무사들의 시점에서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타모리의 증손자인 [[도쿠가와 츠네나리]]는 도쿠가와 종가에 양자로 입적되어 가주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